하얀 수피의 자작나무에 반한다. 만약 하얀 피부에 끌려 자작나무를 좋아한 사람들이 나중에 속이 검은 자작나무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다. 겉이 희고 속이 검은 것은 자작나무의 정체성이다. 겉과 속이 다른 존재를 겉과 속이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드물다.

정명과 나무 이름

이름은 한 존재의 정체성을 담고 있다. 이름은 한 사회의 질서 유지에도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중국의 공자도 정명(正名)을 위해 노력했다. 식물이름도 식물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식물의 학명을 찬찬히 살펴보면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식물학자들이 식물의 이름을 붙일 경우 우선 꽃과 잎과 열매에 관심을 갖는다. 학자들이 꽃과 잎과 열매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꽃과 잎과 열매는 육안으로 쉽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물의 학명 중 속명과 종소명에는 대개 꽃과 잎과 열매를 강조한 내용이 들어 있다.

우리나라 식물 이름도 대개 학명의 내용처럼 꽃과 잎과 열매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식물이 간혹 있다. 그 중 대표적인 나무가 자작나무와 꽝꽝나무다. 두 나무는 모두 이 나무의 꽃과 잎과 열매를 드러낸 이름이 아니라 태우면서 생긴 소리에서 빌린 것이다. 나는 나무 이름의 유래에 관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나무 이름을 과연 누가, 어떤 이유로 붙였는지 늘 궁금하다. 그런데 자작나무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자작나무의 이름을 붙인 사람은 왜 이 나무를 태우면서 생기는 ‘자작자작’에서 이름을 붙이기로 작정했을까. 이 나무의 꽃과 잎과 열매는 이 나무의 특성을 드러내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학명에서 언급한 내용을 참고해서 붙인 것일까?

내가 나무 이름의 유래도 역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작나무 이름의 유래에 대해 마음 한구석 슬픔을 간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름의 유래를 확인할 방법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작나무의 이름을 알려면 이 나무를 직접 태워야 하지만, 결코 그렇게 할 자신이 없다. 혹 누군가가 자른 자작나무를 직접 불에 태우면 알 수도 있겠지만, 그럴 기회가 쉽게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런 기회가 혹 오더라도 그런 실험정신을 발휘할 생각도 거의 없다. 그런데 내가 자작나무의 이름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덧붙이는 속뜻은 다른 데 있다. 사람의 행동은 대상의 이름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자작나무 이름의 유래를 알면 그것을 확인해 보고 싶은 욕망이 생길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아울러 자작나무의 이름에 집착한 나머지 이 나무의 다른 특징에 대해 무관심할까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표리부동의 아름다움

사람들은 겉과 속이 같은 표리일체(表裏一體)의 존재를 그리워한다. 스스로 그런 존재로 온전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때론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表裏不同)의 존재를 비난한다. 그러나 형식논리로만 한 존재를 이해하면, 모든 생명체는 애초부터 표리부동하다. 이 세상에 겉과 속이 같은 자는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무도 겉과 속이 같은 것은 아주 드물다. 고작 배롱나무 정도를 겉과 속이 같은 존재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자작나무는 겉과 속이 다른 나무를 대표할 수 있을 것이다.

자작나무의 겉은 희지만 속은 검다. 많은 사람들이 겉이 하얀 자작나무에 반한다. 만약 하얀 피부에 끌려 자작나무를 좋아한 사람들이 나중에 속이 검은 자작나무를 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하다. 겉이 희고 속이 검은 것은 자작나무의 정체성이다. 겉과 속이 다른 존재를 겉과 속이 같은 존재로 인식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드물다. 이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 중 하나도 사실을 정확하게 보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자작나무의 하얀 피부는 그냥 이루어진 게 아니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칭찬받으려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작나무가 하얀 피부로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도 엄청난 피부 관리를 했기 때문이다. 자작나무가 피부 관리한 흔적이 바로 검은 속이다. 그래서 자작나무의 속이 검지 않다면 하얀 피부를 드러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화촉을 밝히는 자작나무

자작나무는 속이 검지만, 그 검은 속은 세상을 밝히는 불을 만든다. 일본의 식물학자 히로시 하라(原寬, 1911~?)가 붙인 학명에도 자작나무가 불을 밝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제공하고 있다. 자작나무의 속명인 ‘비투멘(bitumen)’은 ‘베툴라(Betula)’에서 유래했다. ‘베툴라’는 원유와 아스팔트 같은 여러 탄화수소의 명칭이다. 학명을 붙인 사람이 이런 내용을 표기한 것은 자작나무의 속에 원유와 아스팔트 같은 탄화수소가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갈리아 지역 사람들은 이 나무를 끓여서 비투멘을 뽑아냈다. 이 지역 사람들이 자작나무를 행운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로마 사람들은 이 나무로 불을 밝혀 사비니(Sabines) 여자들을 유괴했다. 로마 건국설화에 따르면, 로마를 건국한 후 여자가 없어서 인근 사비니 지역의 남녀들을 부르기 위해 축제를 열었다. 중국에서도 일찍부터 이 나무에서 기름을 뽑아 불을 밝혔다.

자작나무를 의미하는 한자는 화(樺)이다. 화는 화(華)와 같은 의미이다. 요즘도 사용하는 화촉(華燭)은 곧 자작나무로 불을 밝히는 화촉(樺燭)을 의미한다. 자작나무는 하얀 피부의 신부와 검은 피부의 신랑이 손을 잡고 서 있는 모습인지도 모른다. 혹 결혼을 앞둔 사람 중 자작나무를 안다면 이 나무 앞에서 사랑을 고백해도 좋을 것이다. 자작나무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방법 중 하나는 나무에겐 좀 미안하지만 자작나무 껍질에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볼펜으로 적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최창균의 「자작나무 여자」를 떨리는 마음으로 낭독하는 것이다.

슬픈 사연으로 태어난 자작나무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먼저 이 땅에 존재했던 나무들에게, 그 중에서도 아주 많은 도움을 준 나무들을 위해 슬픈 탄생 설화를 만들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무의 탄생 설화는 거의 예외 없이 슬픈 사연을 담고 있다. 나무를 비롯한 어떤 존재든 아픔과 슬픔 없이는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작나무도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동유럽의 어떤 왕자가 죽은 후 태어났다. 몽골의 영웅이자 세계역사를 바꿔놓은 칭기즈칸이 유럽을 침략하던 시절,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은 한 왕자가 칭기즈칸 군대의 우수함을 과대 선전해서 유럽군대가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게 했다. 이 사실을 안 유럽의 왕들이 이 왕자를 잡으려 했으나, 그는 깊은 산 속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 구덩이를 파고 흰 명주실로 친친 동여매고 그 속에 몸을 던져 죽었다. 흰 비단을 겹겹이 둘러싼 듯 하얀 껍질을 벗기면 계속 나오는 자작나무는 바로 왕자가 환생한 것이다.

자작나무는 화가의 손을 통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옛날 화공(畵工)들이 자작나무의 껍질을 태워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보 제207호인 「천마도 장니(障泥)」를 그린 것도 자작나무 껍질이다. 그러나 자작나무과의 자작나무의 껍질에만 관심을 가지면 슬픈 사연으로 태어난 자작나무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봄에 피는 자작나무의 꽃은 슬픈 사연을 닮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암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수꽃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자작나무의 잎은 이태리포플러보다 작지만 모습은 아주 닮았다. 그래서 바람 부는 날 자작나무 곁에 서면 잎에서 슬픈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람이 그치면 자작나무잎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내 마음의 호수, 바이칼에서 만난 자작나무

바이칼은 내 마음의 호수다. 바이칼이 내 마음의 호수인 까닭은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언제나 가보고 싶은 곳이기 때문이다. 내가 바이칼을 내 마음의 호수로 삼은 것은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거나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호수이고, 서식 생물 수가 2만5,000종에 달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더욱이 내가 바이칼을 내 마음의 호수로 삼은 것은 백두산을 상징하는 자작나무가 이곳에 살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내가 바이칼을 내 마음의 호수로 삼은 것은 이곳은 결코 내가 쉽게 갈 수 없고, 쉽게 갈 수 없기에 언제나 꿈을 꿔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늘 이곳을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바이칼은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꼭 가야 할 곳은 아니다.

내가 바이칼을 꼭 가야 할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바이칼이 꼭 갈 수 있을 만큼 쉬운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교통이 편리한 세상에 어느 정도 돈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이칼을 찾는다. 나도 그런 사람들처럼 바이칼을 찾고 싶지만, 결코 그곳에 가기 위해 쉽게 짐을 챙길 생각이 없다. 나는 바이칼이 가보고 싶은 마지막 여행지이길 바란다. 바이칼을 마지막 여행지로 삼고 싶은 것은 이곳이 지구상에 남아 있는 가장 원시적인 모습이자 생명체가 꿈꾸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점은 바이칼을 죽을 때까지 밟지 않는 것이다. 내가 정말 가보고 싶으면서도 가지 않으려는 것은 나마저 이곳을 밟으면 오염으로 바이칼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바이칼을 밟지 않으려는 것은 그 신성한, 그 위대한 바이칼을 그리워하기 위해서이다. 정말 사랑한다면 그저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바이칼의 어원은 다양하지만 몽골어에서 유래한 바이칼은 ‘자연’을 의미한다.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몽골어에서 유래한 바이칼에 몽골과 관련한 설화를 간직한 자작나무가 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작나무는 만주에서 시베리아, 남러시아에 이르는 지역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중앙 및 북아시아에서 알타이 굿을 할 때 샤먼은 자작나무와 말을 이용하여 제례를 치른다. 말의 잔등 위에서 자작나무 가지를 흔들며 말을 죽인 뒤 자작나무 가지 불 속에 던진다. 몽골의 부리야트족은 자작나무가 천상계의 문을 열어주는 문의 수호자라 생각했다.

나는 바이칼에 가보지 않고서도 이곳에 자작나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있다. 내가 바이칼에 가보지 않고서도 이곳의 자작나무를 아는 것은 이곳에 다녀온 ‘나비’ 덕분이다. 나비가 들려주고 보여준 바이칼의 자작나무는 직접 백두산에서 본 자작나무나 인근 공원에서 만나는 자작나무와 품격이 달랐다. 바이칼의 맑은 물, 하얀 눈과 함께 하고 있는 자작나무는 정말 나처럼 때 묻은 인간이 근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몇 장의 사진과 얘기만으로도 가슴 벅찰 만큼 아름다운 자작나무를 나처럼 심장 약한 자가 어떻게 직접 가서 볼 수 있을까.

간혹 바이칼의 자작나무가 보고 싶을 때, 바이칼의 자작나무가 숨 쉬는 소리를 듣고 싶을 때, 나는 나비가 선물로 준 자작나무 수공예품을 가슴에 품는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마가목의 잎과 열매를 새긴 작고 앙증맞은 바구니를 가슴에 품고 있노라면 바이칼의 자작나무가 호수에서 춤을 춘다. 호수에 달이 비치는 날, 자작나무가 별을 찾아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이칼의 자작나무는 내 마음의 수호신이다. 바이칼 없는 자작나무, 자작나무 없는 바이칼은 상상만으로도 내겐 천벌이자 지옥이다.

자작나무 여자

그의 슬픔이 걷는다.

슬픔이 아주 긴 종아리의 그,

먼 계곡에서 물 길어올리는지

저물녘 자작나무숲

더욱더 하얘진 종아리 걸어가고 걸어온다.

그가 인 물동이 찔끔,

저 엎질러지는 생각이 자욱 종아리 적신다.

웃자라는 생각을 다 걷지 못하는

종아리의 슬픔이 너무나 눈부실 때

그도 검은 땅 털썩 주저앉고 싶었을 게다.

생의 횃대에 아주 오르고 싶었을 게다

참았던 숲살이 벗어나기 위해

또는 흰 새가 나는 달빛의 길을 걸어는 보려

하얀 침묵의 껍질 한 꺼풀씩 벗기는,

그도 누군가에게 기대어보듯 종아리 올려놓은 밤

거기 외려 잠들지 못하는 어둠

그의 종아리께 환하게 먹기름으로 탄다.

그래, 그래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백년 자작나무숲에 살자

종아리가 슬픈 여자,

그 흰 종아리의 슬픔이 다시 길게 걷는다.